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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

아들아 난 널 죽게 둘 수 없었다.




“밤이면 두려움은 더욱 커갔습니다전 아들을 그냥 죽게 둘수 없었습니다. Mothers day는 물론 명절이 와도 홀로 집을 지키며 사랑하는 아들들이 못내 그리워 하얗게 밤을 지새는 기구한 삶을 살아온 한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눈물이 말랐다는 그녀이지만 남의 아픈 사연에도 금새 눈물이 맺히는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요타국에서 어렵게 생활한 부모님들 이번 사연을 읽으며 타국에서 고생하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필자 주] 코리안저널 신문고 주디하트만 (2008 7월 신문고

 

김씨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집에는 항시 사람이 넘쳤습니다그러나 8세에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어머니는 재가를 위해 저를 한집의 양녀로 보냈습니다. 8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사이도 없이 가정은 산산히 조각나고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새 가정에 적응하지도 못했습니다”라며 어린날을 회상한다.

 

양녀 아닌 양녀로 들어가 해야하는 남의 집살이는 그나마 참을수 있었습니다그러나 배고픔에 지쳐 이디오피아난민들 처럼 배만 나온 8살의 계집애. 12월매서운 추위와 배고픔을 못이겨 주인이 가마솥 옆에 퍼 논 밥을 먹다 들켜모진매를 맞고 벌거벗은 채로 거리로 내몰리기 일쑤였습니다당시 그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언니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마른장작으로 흠씬 두들겨 맞아 마루끝에서 떠는 저를 방으로 데려와 제 짐을 쌌습니다. 10원을 주며  이것 말고는 가진 것이 없구나. 나는 돈이라도 받으며 식모를 살지만 너는 이게 뭐냐?, 다른 곳으로 떠나면 이보다 나을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새벽에 그집을 몰래 빠져나와 어디가는지도 모르는 차를 타고 마냥갔습니다그곳에서 노인부부를 만나 더부살이를 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시 전 그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11살로 성장했지만 갈곳없던 저는 논에 쌓아논 볏단을 집 삼아 기거하며 동네 잔심부름을 거들었습니다그저 잠잘곳과 먹을것만 있다면 세상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항상 배가 고팠던 시절 천호동 골목에서 구두도 닦고 식당일도 했지만 친 어머니가 버렸다는 상실감은 더욱 커갔습니다배움은 커녕 홀로 거리에 나섰던 어린시절 “만일 태어나 줄곳 어렵게 살았다면가난에 허덕이며 헐벗었거나, 5살이었던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면, 8살 어린나이에 양녀로 들어간 집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거리로 뛰쳐나오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나이에는 갑자기 변한 환경과 친어머니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은 세상에 미움과 원망을 낳게 했습니다”.

 

물론 그 시절은 나라가 가난했기에 거리에 걸인들이 넘치고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그러나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에서 친 어머니의 오판으로 저는 버림받은 채 성장했지만 해가 바뀌는 만큼 엄마와 동생에 그리움은 원망과 한은 같이 커 갔습니다남의 집 일을 하다가도 설움이 복받치고 죽었을지 살았을 지 모를 동생이 보고파  힘이들 때면 술을 마셨습니다그러나 어느날인가 부터 내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고 있었습니다소주병을 안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알콜 중독 폐인으로 내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만나게된 일본과 미국인 혼혈 미군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와 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수소문 끝에 찾아왔다는 어머니는 그토록 생사를 몰라 가슴 아파하던 동생을 데리고 나타난 겁니다어머니는 미안하다 어떻게 지냈니라고 묻는 대신 “돈이 없어 찾아왔다”며 돈을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신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왜 나를 버리고 이제와서 어떻게 나를 찾아서 돈을 요구하냐?”며 대들었던 것이 저와 어머니의 마지막 만남이 었습니다첫 아들을 낳은 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아들을 임신하고 알콜중독같이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술을 끊을수 있었습니다그것이 엄마의 사랑의 힘이거늘 어찌 저는 그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그리도 험하게 살았는 지 알 수없습니다그래도 남편복이 있었는지 살면서 큰 소리 한번내지 않고싸움없이 살았기에 남편에 대한 믿음은 세상에 대한 원망이 저의 가슴에서 서서히 걷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둘째가 태어나고 작은 집을 장만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자신의 병든 노모를 모신다며 조 금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감행했습니다그러나 2년도 안돼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남편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횟수가 늘더니 급기야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큰 소리 한번 내지않고 살았기에 남편이 왜 이혼을 요구하는 지 알 수없었습니다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이혼을 미뤄 달라고 무릎을 꿇고 울며 사정 했지만 97년 두 아들을 내게 맡긴채 결혼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고통의 터널속에서

이혼의 충격은 너무도 컸습니다. “채 5백 달러도 안되는 양육비를 받고 한 달을 벌어도 음식을 사기에도 빠듯한 급여로 집 페이먼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산지 2년도 안된 집을 팔고 겨우 작고 낡은 트레일러 하우스 하나를 빌릴 수 있었습니다.”하루 종일 일을 해도 한달에 7백 달러이사를 했지만 월세와 공과금을 내면 식비는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식비를 카드로 충당하면서 급기야 빚이 늘어 파산선고를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일을 했지만 사춘기의 아들들은 가정에서 돌보지 못하는 저를 원망하며 나쁜 길로 접어 들었습니다”패물과 작은 물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하지만 다행이 저를 좋아하던 남자친구와 합치고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채워 주었습니다이혼 후 아이들을 한번도 만나려하지 않았던 전 남편.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정이 그리웠던 아이들은 남자친구로 인해 다시 밝아졌고 문제를 상의하며 안정을 찾아 갔습니다마치 저희 가정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가 깨지고 삶이 깨졌다.

2000년 부터 도보로 5분도 안되는 이씨 소유의 세탁소에서 일을 했습니다북쪽에 사는 그에게는 먼 거리였기에 부탁하면 언제든 세탁소 문을 열고 닫는 것까지 기꺼이 도왔습니다. 6 25 센트를 받고 세탁소에서 일했고, 2년 동안 그들도 친절히 잘대해 주었기에 저 또한 시간 외 수당을 받지 못해도 진심으로 돕고 싶었습니다. 2002년 어느 날 이씨는 2만 달러의 계원이 되기를 부탁 했습니다그러나 궁핍한 생활에 계를 든다고도직업을 잃게 될까 무서워 안든다고 딱 자를 수 없었습니다

 

생각끝에 반 구찌인 만 불만 넣기로 했습니다그러나 제 차례가 되자 이씨는 곗돈을 주기 전에 5천 달러를 먼저 빌려 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물론 그때도 직업을 잃을까 걱정되어 거절을 하지 못하고 또한 그들을 믿었기에 돈을 빌려주면서 “내 형편이도 힘드니 내가 달라면 주셔야합니다”라며 돈을 꾸어주는 것을 승락 했습니다그러나 그 후 5천 달러를 갚으라는 제게 5천 달러를 이용해 3만 달러 계를 붓고 차액은 급여에서 보충 하라고 종용했습니다”

 

5천 달러를 받기 위해 시작한 3만 달러 곗돈의 차액은 급여를 넘었습니다. “월요일 부터 목요일까지 세탁소에서 일 했지만 곗돈이 모자라 3일간 12시간 씩 공장에서 일한 급여로 충당했습니다뿐만 아니라 2004 6월 불의의 사고로 남자 친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러나 계가 이미 깨졌음에도 장사를 지내고 넋이 나간 제게 곗돈을 받아갔고남자친구의 부조금까지 계원들에게 거뒀으나이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백 달러만을 건넸을 뿐입니다”.

 

피해 인원만도 20여명이 넘고 피해액만도 40만 불이 넘습니다피해자들과 함께 이씨를 형사건으로 고소하고  4년이라는 세월을 법정에서 싸워야했습니다저는 법정에서 “이씨를 믿었기에 투잡으로 곗돈을 부으며 작은 집을 마련하고자 했던 꿈마져 깨졌노라 울부짖었습니다누가 피와 바꾸고 아들들의 인생과 바꾼 돈을 받고 싶지 않았을까요그러나 돈을 이미 빼돌려 받을 길이 없음을 알기에 돈을 포기하고 이씨가 죄의 댓가를 받아야 한다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해자 중에는 소송기간이 길어지며 암 선고를 받고 유서까지 쓴 사람이 있는 가하면암 투병으로 머리가 몽땅 빠진채 이발소에서 일하는 할머니도 계십니다남편 몰래 계를 했다가 가정파탄을 겪을 뻔한 사람, 20대 초반에 파산선고를 했던 젊은이계의 충격으로 몸져 누워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까지 눈물 없이는 볼 수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상처는 자식의 어긋난 삶

남자친구가 죽고계가 깨지는 등힘든 나날이 계속되자 아들들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마약으로 깊숙히 빠져 들었습니다. “아들들이 갱집단에서 탈퇴하려 하자어느날 밤 총성이 두번이나 났어요아침에 보니 차 뒷 트렁크를 관통한 두발의 총알이 뒷좌석을 통과해 앞 좌석에 맞고 떨어져 있더군요마약에 취한 모습을 바라볼 수도아들을 죽게 둘 수도 없었습니다”

 

집에오면 그 친구들이 찾아올까봐 아들의 접근금지 명령을 신청했습니다아들은 집 근처를 배회하며 전화로 원망을 욕설로 풀어 내면서도 마약을 멈출수 없었습니다중독이 심한 큰 아들을 살려기 위해 911에 신고해큰 아들은 3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고불심 검문으로 체포된 작은 아들은 1년 이상 옥에서 지냈습니다.

 

“아들을 살려야 했지만아들을 위협하던 갱 조직과 이씨에 대한 배신감아들에 대한 죄책감에 문을 나설수 없었습니다집에는 이미 생필품은 물론 먹을 것 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낮에도 문 밖에 나갈 수 없고밤에도 불을 켤 수 없을 정도로 공포가 밀려왔습니다”저의 소식을 전해듣고 식료품점을 경영하는 분이 5백 달러를 전달해 주셨습니다그 온정은 저를 집밖으로 끌어내고 일을 해갚겠다는 희망이 되었습니다정말이지 너무도 감사했으며 제게는 큰 힘이 되는 돈이 었습니다.

 

필자주이제는 너무도 낧아버린 트레일러는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 물이새고 언제 무너질지 모를 공포심마져 유발 시키고 있습니다그러나 파산선고를 김씨는 이 트레일러를 바꿀 여유도 없습니다. “나 보다 감옥에서 나온 아들들이 사회의 일원이 되어 열심히 살기만을 빈다”며 오늘도 기도로 밤을 지새보지만회한 많은 삶투 잡을 뛰어 보지만 글을 읽을 수도 쓸수도 없기에 그녀의 삶은 고되기만 합니다

 

게다가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도 제대로 쉴수없고 베네핏을 받을 일을 찾아보지만 이도 쉽지만은 않습니다공부를 하고 싶지만 여건이 되지않는 다며 그저 열심히 하루하루를 산다는 그녀아들들이 자신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당시의 심정을 알아 줄때까지두 아들이 마약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빈 둥지를 지키며 기도를 합니다언젠가 함께할 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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