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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역사

그들의 슬프고도 고된 삶 -1




자유를 빼앗긴 인디언
그들의 진정한 자유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케네딧컷 인디언들의 언어에 아버지=아파치 계집아이=가시나 헛간=허깬 지붕=덮이로 한국말과 유사성이 많다. 게다가 일부학자들은 케네딧컷은 한국어 큰 내터가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한국의 2004년 1월 31일 뉴스에 의하면  
한국인이 유전적으로도 몽골인과는 매우 가까운 반면 중국인과는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대규모 DNA 검사로 처음 입증됐다고 보도했다. .


인디언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땅을 잃었다. 하지만 아직도 학살의 역사속에서도 자유를 얻지 못한채 인디안 보호구역에 묶여,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직업도 얻지 못한채, 마약과 술 그리고 황폐해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클릭베이 - 주디하트만 2004년 9월 30일 

[사진 설명: 미국 정부는 2010년에 미국 초기 정부가 원주민을 탄압하고 강제 이주 시킨 점에 사과하였다. 호주가 2007년에 원주민에 사과한 담화을 발표한 것보다 3년이나 늦었다.

2010년 샘 브라운백 공화당 상원의원은 워싱턴 D.C.의 의회묘지에서 진행된 원주민 부족 행사에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및 폭력행위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낭독했다.

이 결의안은 2004년 부터 추진되어 왔으나, 2010년에 되어서야 오바마 대통령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인디언들에 대한 피로 얼룩진 인종 말살의 위기였던 탄압의 2백년 역사는 인디언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소송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북 미 대륙에 들어온 백인들의 첫해 겨울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갈 때 도움을 줬던 인디언들. 그러나 오늘날 매년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들을 몰아냈던 이들을 상대로 미 전역에서 시위를 벌이지만, 그들의 자유를 위한 길은 멀기만 하다. 

인디언들은 땅을 찾아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고 알려진 바 있으나 그들은 소수의 인디언 뿐이며, 사실상 팡인리치, 싸우쓰타코타 , 파인레지 레저베이션, 뉴멕시코의 샌디에 레져베이션 등의 인디안 보호구역인 집단지에 갇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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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은 초기 미 연방 정부가 지급하던 것과 달라진것이 거의 없다. 불모의 사막지대의 인디언들을 위한 생계보조로 매달 몇 십 달러에서 몇 백 달러를 보조하였던 보조금이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복지에 대해 아무런 원조도하지 않으며, 처참한 가난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다수의 인디언들은 알콜로, 마약으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고 있다.


인디언들에 관한 서적이나 오래된 서부 영화를 보면, 우리는 그들의 놀라운 전투
 및 살해 그리고 머리 가죽 벗기기 등을 흔히 연상한다. 그러나 그들 그들은 정작 
전쟁에서 적과 가까운 접촉을 기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같은 영화의 묘사는 많이 포장되어 있으며, 첸양의 많은 용감한 성공적인 전사들은 결코 누군가를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같은 인디언의 전사들은 말을 얻기위한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우리들이 생각하는 전쟁을 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백인들이 이들의 생활을 방해하기 전까지는 이들의 전쟁은 유혈전쟁이 아니였으며, 쉽게 용서하는 부족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같은 이익을 위해 전쟁을 계속했을 뿐, 왜곡된 영화 속에 묘사된 모습은 그들이 결코 아니였다. 다시 말해 남자는 용감성의 높은 명망을 소유하기를 자랑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불시의 일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50년 당시 이들은 흔하게 도보로 전쟁에 임했다. 소풍과도 같은 전쟁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의 규범이 었다. 이와 반대로, 어떤 중대한 인명 상해가 부족에 주어질때, 이 상해를 원수를 갚는 전쟁에 말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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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별한 전쟁을 위하여 주술사의 기도를 필요로하였다. 
이 의식은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방패의 역할로서 거행되었다. 

이 의식동안 버팔로 두개골 밑에 전쟁에 참가하는 젊은이들은 팔과 다리에서 피부를 조금씩 잘랐다. 첸양 인디언들은 이 의식을 "커트 팔." 이라 불렀다.

친구나 친지의 죽음을 보복을 위해 머릿가죽을 얻는 행위는 작은 개인 특공대인 죽은이의 친척들이었다. 

말을 이용할 중요한 목적중에 하나인 이같은 행위는 밤에 야영지로 몰래 움직이기도 하였으며, 특히 머릿가죽을 획득하기 위해 혼자 여행하는 자를 우연히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유타의 인디안은 남쪽 록키 산맥의 산악 지역에서 거쳐하였으며, 
그 후 콜로라도의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분포되어 1500 A.D.부터 거주하였다. 
현재 유타지역엔 세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다. 북부유타, 윤타, 오레이등이며, 
콜로라도의 남쪽 유텔그나시오 등에 거주하였다.

1884년 콜로라도의 각종 지역에 거주하였던 인디언 부족들은 현제 콜로라도에 그렇게 많이 거주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로 인디언들을 1924년까지 시민으로 의회에서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는 예약하에 살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열거하는 특별한 인구 조사를 했다. 

이 인구 조사 목록은 1884년 7월 4일 요청에 의하여 그들의 대리인들에의해 연례적으로 인디언들을 자신들에게 복종시켰다. 콜로라도 국가 기록 보관소에 발견되는 기록은1885년 -1944년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인구 조사이다. 

1930년 조사를 보면 인디언의 이름, 인구 조사 정보, 생년월일, 가장의 성, 및 관계를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인디언들의 개인적인 혈액형, 계급에 대한 인구 조사 정보, 배우자의 유무, 병의 상태, 거주의 장소, 그리고 또한 잡다한 논평을 포함했다.

1864년 11월29-30일 아메리카 인디언 남자들에 대한 대학살 (모래 시내 대학살), 
군인과 정착자들에 의해 첸양과 아라파헤 인디안 야영지의 남성은 물론 여자 및 아이들까지 무차별 폭력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이는 여러곳에 흩어져 살던 인디언들에 대한 급습은 백인 정착자와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에 다량의 악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후 그들을 위한 특사와 블랙캐슬과 첸영 및 약간의 아라파헤를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하여 겨울 야영지를 포트 리용까지 대략 40 마일간 설치했다.

야영지에 미국 국기 그리고 저항을 포기를 의미하는 백기가 펄럭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보호구역내 학살은 계속 되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대략 200여명의 인디언들이 학살 되었으며, 보호되고 있던 2/3를 희생시켰다.
 
1868년 "인디언의 조상들의 땅을 처분하는 계약을 운동하기 위하여"라는 슬로건하에 콜로라도와 유타의 인디언 대표단들은 워싱톤의 피해 통제안에 들어가게 된다.

1895년 인디언에 대한 사냥꾼 행위는1880의 조약을 철회하고

1888의 조약에의해 개설한 영원한 보호를 설치하였다.

1896년 남쪽유타의 땅에 대한 할부금이 배부 되었다.

1906년 유타 국경 땅과 메사 베르디 국립 공원을 바꾸는 동의안 계약.

1924년 아메리카 인디언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36년 남쪽 유타의 헌법 및 부족 회의를 채택하였다.

1937년 피해 복구 동원책으로 남쪽 유타 인디언들에게 소유지 2십 2만 2천 에이커를 돌려 주었다.

1938년 3만 에이커는 유타의 마운틴 유타로 돌려 주었다. 

1940년 유타의 마운틴 유타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1950년 미국 법원은 콜로라도와 유타의 동맹 시키기를 요구하고 그들에게 거의 3천 2백만 달러를 수여하였다.

1986-88년 콜로라도 유타 근해 타협
 
그러나 콜로라도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대해 
“인디언에게 돌려준 것으로 나와 있는 땅은 가지라고 돌려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땅을 주는 대신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는 조건의 인디안 보호구역을 설치한 것”이라고 인디언 어머니를 가진 카라는 내게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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